김규나
전원 스위치를 내리는 것처럼 다채로웠던 세상의 스위치가 꺼지고, 한순간에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포부로만 똘똘 뭉쳐 있던 나의 10대 끝자락은 그렇게 현실감각을 잃고 기질은 몽상가로 채워져서 회색빛 세상 안에서 자신을 단절시키고, 고립시켰다. 어디로든 떠나면 그 어떤 것이라도 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산으로 향했다. 잘 알려지지 않아 바다의 고요함을 온전히 누릴 장소는 찾아냈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방랑자를 꿈꾸고, 숲속에 숨어 사는 은둔자를 꿈꾸고, 현실을 초월한 요가강사를 꿈꾸고, 세상에 통달한 현명한 철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묵언수행을 업으로 삼는 종교인이 되고 싶기도 했다. 이런 내가 있으면, 저런 나도 있다. 삶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면, 자신 안에 낯선 자아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에서 아주 조금만 자유로우면 계속해서 어떤 문이 열린다. 그 문들을 지나오니, 지금은 복잡한 도시에서 나를 잃지 않고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며, 매일 성실하게 회사를 다니고 즐겁게 살아가는 중이다. 과거가 후회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만약 다른 과거를 선택할 수 있고, 그래서 지금 현재를 잃는다면 그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 나는 스스로를 편안하게 느끼며, 삶을 만끽하고 있다. 부디, 당신도 편안하고 부드러운 현실을 만나길 바라며 새로운 자신을 만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그 마음의 반짝임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스며들 수 있길 바라며 모든 글자들을 당신에게 바친다.